[칼럼] 나영무 박사의 '말기 암 극복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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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돈가스가 꿀맛"···하마처럼 먹어야할 '암환자 소울푸드'
‘사람은 결국 굶어 죽는다.’
세브란스병원 인턴 시절, 질병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한 선배가 던진 말이다.
인간이 굶으면 영양 섭취가 부족하고, 영양실조는 몸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면역력 저하는 결국 사망으로 이어진다는 요지였다.
당시 나는 이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내가 암 환자가 되고 난 후 가슴으로 더 깊게 공감하게 됐다.
암 환자는 기본적으로 입맛이 없다.
먼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식욕 부진으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암세포가 다양한 식욕 억제물질을 배출해 미각과 후각의 이상을 초래하거나 조기 포만감 등으로 입맛을 빼앗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항암 약물 등의 영향으로 먹다가 토하고, 더 나아가 음식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나 역시 항암치료 기간에 식욕 부진으로 고생했다.
집에서 아내가 영양식으로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줬는데 입에 대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유명 맛집에서 갈비탕과 설렁탕을 포장해 왔는데도 한 숟가락도 뜨지 못한 채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간 적도 있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은 속상해하면서 함께 입맛을 잃었고, 나도 미안한 마음에 무척 괴로웠다.
하지만 항암치료를 받을 때는 어떻게든 먹어야 한다.
먹을 수 있는 건 무엇이라도 닥치는 대로 먹어야 한다.
‘하마’처럼 식탐을 부려서 다섯끼, 여섯끼라도 먹어야 한다.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충분한 영양 공급을 통해 체력을 유지해야 독한 항암치료를 견뎌내고, 수술 후 합병증 발생 가능성도 줄일 수 있어서다.
이런 이유로 나는 항암 기간에 ‘식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먼저 힘을 내기 위해 고기류를 먹었다. 특히 생선과 달걀은 거의 매일 먹다시피 했다.
비록 설사를 많이 했지만 기름지거나 맵고 짠 음식 등도 먹을 수만 있다면 먹었다.
또한 구토하고 난 뒤에도 음식을 조금씩 계속 먹었다.
토하더라도 내용물의 20~30%는 몸 안에 흡수돼 암세포와 싸울 수 있는 영양분이 될 수 있어서다.
전혀 먹지 못하거나, 설사가 심한 경우에는 포도당과 아미노산 등 주기적으로 수액을 맞아 에너지를 보충하기도 했다.
뷔페 가기도 한 방법이었다.
다양한 먹거리 전시장에서 덜 구역질 나는 음식을 찾기 위한 것인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어느 날은 LA갈비가 부드럽게 넘어가 한동안 먹었고, 어떤 날은 잔치국수와 나물 비빔밥, 다른 날은 스파게티와 티라미슈 케이크 등 혀가 당기는 대로 먹었다. 못 먹을 때에는 포도와 감을 먹으면서 끼니를 채우기도 했다.
하지만 항암치료 이후 일상에서는 식단 관리에 신경을 썼다.
무엇보다 하루 세끼 규칙적이고 균형 잡힌 식단 구성에 초점을 두었다.
사실 암 환자에게 좋다는 음식 정보는 흘러넘치지만, 암은 항암 식품 한두 개로 낫지 않는다.
내 식단은 채소류와 단백질 위주로 구성했다.
하루의 예를 든다면 식전에 유산균을 먹은 뒤 아침은 잡곡밥-미역국-봄동나물 무침-김치, 점심은 밥-황태국-생선구이-호박전-가지나물, 저녁은 잡곡밥-청국장-브로콜리-무나물 등이다.
1주일에 한 번씩은 붉은색 고기를 먹었고, 과일과 제철 나물은 거르지 않았다.
또한 호두와 아몬드 등 견과류와 베리류는 간식용으로 허기를 느낄 때 애용했다.
암 환자가 먹거리에 신경 써야 하는 이유는 ‘단백질’ 때문이다.
암세포와 싸우기 위해서는 충분한 열량 섭취가 필수인데 그 중심에 단백질이 자리한다.
단백질은 뼈와 근육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단백질이 부족하면 근육 부족으로 이어지고, 결국 체력 회복이 힘들어 위험하다.
단백질은 20여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뤄지는데 이중 절반은 필수아미노산(essential amino acid)이다.
필수아미노산은 몸에서 합성되지 않거나, 합성되더라도 양이 적어 생리 기능을 하는 데 충분하지 않아 반드시 외부에서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데 육류에 많이 함유돼 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와 생선 등이 영양학적으로 완전 단백질에 속하고, 콩과 두부가 부분 단백질로 분류된다.
무엇보다 채식 식단만으로는 영양소가 부족할 수 있기에 단백질이 가미된 식단을 자신의 상태에 맞게 짜는 것을 추천한다.
내게 도움이 됐던 음식은 다음과 같다.
‘감자전, 호박, 크래커, 꿀물, 이온음료, 야채, 죽, 감자, 고구마, 닭고기, 버섯, 생선, 여러 가지 나물(콩나물, 시금치 등), 계란찜, 오징어 요리, 연두부, 갈비탕, 국수, 샤브샤브, 장조림, 백김치, 동치미, 대구탕, 동태탕, 오징어 뭇국, 생선조림 및 구이(특히 갈치)’ 등이다.
여기서 갈비탕은 국물만 먹기보다는 고기도 함께 먹어야 단백질을 효과적으로 섭취할 수 있다.
이와함께 몸에 안 좋은 음식은 철저히 가리는 지혜도 동반돼야 한다.
동물성 기름이 많은 음식, 맵고 짜고 자극성 강한 음식, 탄 음식 등을 피하고 과식과 폭식도 멀리해야 한다.
암 환자의 먹는 것 중에서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기호식품인 커피다. 커피는 다소 위에 부담을 줄 수 있어서 권고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 1차 수술에 이어 항암치료를 마친 뒤 의료진과 상의해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니 ‘정상인의 삶을 살고 있다’는 심리적 느낌이었다.
음식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데 투병 기간에 발견한 소울 푸드가 떠올랐다.
2박 3일간의 항암 치료를 마친 어느 토요일 오후.
입맛도 없고 몸에 힘도 빠졌지만 뭔가를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에서 걸어 나와 연세대 학생회관 지하 식당으로 갔는데 고소한 냄새 끌려 돈가스를 먹었다.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항암치료의 고단함을 달래줬던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식사를 마친 뒤 학교 교정을 산책했다.
풋풋하고 열정 넘쳤던 대학 시절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추억의 시간 만큼은 항암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암은 내 몸에 아픔을 주었지만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한 시간도 준 것 같다.
“그래, 암아 고맙다! 앞으로 잘 먹고 잘살아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좋은 일도 하면서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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